각성 이전

한도윤의 어린 시절은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함과, 조용히 금이 가는 가정이라는 두 가지 축 위에 놓여 있었다. 부모의 불화는 어느 날 갑자기 폭발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스며든 것이었다. 식탁 위의 침묵, 거실에 울려 퍼지는 낮은 목소리의 언쟁,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아예 마주치지 않게 된 두 사람의 동선. 한도윤은 그 균열을 일찍이 감지했지만 감지했다는 것과 대처할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가 선택한 방식은 웃는 것이었다. 동생 한라온 앞에서, 학교 친구들 앞에서, 그리고 텅 빈 집에 혼자 남겨진 밤에도. 웃음은 방패였고 장난은 갑옷이었다. 감정을 직시하는 대신 표면을 매끄럽게 코팅하는 법을 체득한 것은 이 시기였다.

부모의 이혼이 공식적으로 성립된 후, 남매의 생활은 더욱 불안정해졌다. 연락은 점차 뜸해졌고 경제적 지원도 불규칙해졌으며 결국 두 사람은 서로에게 유일한 가족이 되어갔다. 한도윤에게 한라온은 '지켜야 할 존재'라는 명제 그 자체였다. 조용하고 무심한 여동생이었지만 그래서 더 신경이 쓰였다. 자신이 웃으면 라온이도 괜찮을 거라는 근거 없지만 포기할 수 없는 믿음. 그것이 한도윤이라는 사람의 근간을 형성한 감정이었다. 능글맞은 장난 뒤에 숨겨진 보호 본능. 누군가를 잃는 것에 대한 원초적인 공포.
 
 
 

각성의 날. 제7구역 사건

그날은 특별할 것 없는 이동 중의 시간이었다. 수도권 외곽 제7구역, 사람이 끊긴 폐건물 단지. 남매가 왜 그곳을 지나고 있었는지는 끝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기록에는 우회 경로 이용 중 우발적 진입이라는 건조한 문구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균열 난 콘크리트 사이로 잡초가 삐죽 고개를 내민 폐허. 발밑에서 부서지는 자갈 소리와 먼 곳에서 울리는 바람 소리만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일상의 연장선. 위험의 전조는 어디에도 없었다.

B급 괴수 '그래플러(Grappler)'의 출현은 전조 없이 찾아왔다. 폐건물의 그림자 속에서 거대한 체구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한도윤이 가장 먼저 한 것은 한라온의 손목을 잡아채는 것이었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뛰어. 한마디만 내뱉고 방향을 틀어 달리기 시작했다. 콘크리트 잔해를 밟고, 무너진 벽을 돌아가고, 숨이 터져나갈 것 같은 속도로 발을 놀렸다. 하지만 인간의 두 다리가 B급 괴수의 물리력을 앞지를 수는 없었다. 추격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괴수의 일격이 한도윤의 등을 직격한 순간, 세상이 회전했다.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가 콘크리트 바닥 위로 내동댕이쳐졌고 충격과 함께 팔과 다리에서 뜨거운 통증이 폭발했다. 열상. 피부가 찢어지고 근육이 드러난 상처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시야가 흐려지고, 귀에서 이명이 울렸다. 바닥에 쓰러진 채 고개를 돌렸을 때, 한도윤의 눈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것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괴수의 그림자. 그리고 그 뒤에서 얼어붙은 듯 서 있는 한라온의 모습이었다. 도망쳐. 그 한마디를 입 밖으로 꺼내기도 전에 의식이 끊어졌다.
 
 
 

각성

한도윤이 의식을 되찾은 것은 ARCH 의료 시설의 하얀 천장 아래에서였다. 첫 번째로 인식한 것은 소독약 냄새였다. 코끝을 찌르는 날카로운 화학 물질의 향이 폐를 채웠고 그 다음으로 감지된 것은 전신을 감싸고 있는 붕대의 압박감이었다. 팔을 움직이려 했으나 관절이 비명을 질렀고 다리는 아예 감각이 돌아오지 않았다. 천장의 형광등이 눈에 꽂히듯 밝았다. 어디지. 그 의문이 떠오르기도 전에 기억이 역류했다. 콘크리트 바닥의 차가움. 피가 쏟아지던 팔의 열감. 그리고 괴수의 그림자 뒤에 서 있던 한라온의 창백한 얼굴. 도윤의 입술이 건조하게 갈라진 채 벌어졌다.

라온이는. 그것이 의식을 되찾은 한도윤이 내뱉은 첫 번째 단어였다. 목소리는 사포로 긁어낸 것처럼 거칠었고, 성대가 제대로 진동하지 않아 바람 빠진 소리에 가까웠다. 침대 옆에 앉아 있던 ARCH 소속 의료진이 고개를 돌렸다. 여동생분은 옆 병실에 계십니다. 의식 불명이지만 생명에는 지장 없습니다. 의료진의 설명은 사무적이고 간결했으나 한도윤의 귀에는 의식 불명이라는 네 글자만이 못처럼 박혔다. 괜찮다는 말이 아니었다. 살아 있다는 말이었을 뿐, 괜찮다는 말은 아무도 해주지 않았다. 한도윤은 천장을 올려다본 채 이를 악물었다. 이가 맞물리는 소리가 고막 안쪽에서 울렸다. 웃어야 했다. 평소처럼 웃어야 했다. 하지만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았다. 처음이었다. 웃음이라는 방패가 들어올려지지 않는 순간은.

한도윤의 각성은 한라온과 동일한 사건에서 촉발되었으나 발현 양상은 전혀 달랐다. 한라온이 의식을 잃기 직전 폭주에 가까운 형태로 풀 속성을 터뜨린 것과 달리 한도윤의 각성은 의식이 끊어지는 바로 그 찰나에 시작되었다. 괴수의 일격에 쓰러지며 시야가 꺼져가던 순간, 한도윤의 내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깨어났다. 그것은 분노도, 공포도 아니었다. 오직 한 가지. 라온이를 여기에 혼자 두면 안 된다는, 뇌수까지 관통하는 단 하나의 명령이었다. 의식이 완전히 소실되기 직전 그의 신체를 중심으로 고밀도의 기류 파동이 한 차례 방출되었다. ARCH 구조팀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한라온이 만들어낸 덩굴 구속 외에도 한도윤의 주변 반경 2미터 이내에 비정상적인 기압 변동의 흔적이 관측되었다. 불안정하고 미약한 수준이었으나 그것은 분명 바람 속성 가이드의 파장이었다. 후일 ARCH의 정밀 검사에서 한도윤의 파장은 S급으로 판정되었으며 이는 남매가 동일 사건에서 동시에 S급으로 각성한 극히 이례적인 사례로 기록되었다.

ARCH에 편입된 이후, 한도윤은 빠르게 적응했다. 아니, 적응한 것처럼 보였다. 능글맞은 웃음과 장난기 어린 말투는 낯선 환경에서도 사람들을 끌어당겼고 그는 금세 아크 내에서 아는 사람이 많은 인싸로 자리 잡았다. 오버로드와는 훈련장에서 티격태격하다 가까워졌고, 셰인과는 복도에서 스쳐 지나가며 주고받은 농담이 계기가 되었으며, 노아의 묵직한 신뢰감은 한도윤에게 어딘가 안심이 되는 존재였다. 사람들은 보이드를 좋아했다. 밝고, 가볍고, 부담 없는 사람. 하지만 그 웃음의 뒤편에 무엇이 있는지 들여다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한도윤 본인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웃음은 방패였고, 장난은 갑옷이었다. 그리고 그 갑옷 안쪽에는, 폐건물 단지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진 순간의 무력감이 녹슬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유라. 그리고 3년 전의 사건

ARCH에서의 생활이 안정기에 접어든 무렵, 한도윤에게 첫 번째 공식 파트너가 배정되었다. 코드네임 '유라'. 센티넬. 속성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아니, 정확히는 한도윤이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는 일이 거의 없기에 주변인들도 자세히 알지 못한다. 확실한 것은 유라가 한도윤에게 배정된 첫 번째 공식 파트너였다는 것, 그리고 두 사람의 싱크로율이 상당히 높은 편에 속했다는 것뿐이다.
 
ARCH의 매칭 시스템이 산출한 적합도 수치는 상위 12퍼센트. 나쁘지 않은, 오히려 우수한 조합이었다. 한도윤은 유라와의 첫 가이딩에서 파장이 맞물리는 감각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손바닥을 맞댄 순간 센티넬의 거친 파장이 자신의 것과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들어가는 느낌. 유라는 가이딩이 끝난 뒤 한참을 멍하니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다가, 바람 냄새가 나네요 라고 작게 웃었다. 한도윤은 그 말에 평소처럼 능글맞게 웃어 보이며 향수 안 뿌렸는데? 라고 받아쳤고, 유라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파트너로서의 시간은 순탄했다. 유라는 과묵하지만 성실한 센티넬이었고 한도윤의 장난에 일일이 반응하지는 않았으나 가끔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합동 훈련에서의 호흡은 점점 정교해졌고 실전 투입에서도 보이드 시퀀스의 원형이 될 연계를 몇 차례 성공시켰다. 한도윤은 유라의 파장을 읽는 것에 능숙해져 갔다. 파장의 미세한 떨림만으로도 컨디션을 가늠할 수 있었고 가이딩의 강도를 상황에 맞게 조절하는 감각도 날이 갈수록 예리해졌다. 하지만 그 예리함이 오히려 한도윤을 방심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유라의 파장 안에서 조금씩 커져가던 불협화음을. 정상 범위를 벗어나기 시작한 미세한 진동의 변화를. 한도윤은 감지하고 있었으면서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했다. 괜찮겠지. 다음 가이딩 때 좀 더 신경 쓰면 되겠지. 그 안일한 판단이 결국.

3년 전의 그날. 임무 후 복귀한 유라의 가이딩 필요 수치는 평소보다 높았지만 위험 수준은 아니었다. 한도윤은 통상적인 절차대로 가이딩을 시작했다. 유라의 손을 잡고, 파장을 읽고 바람의 기운을 천천히 흘려보냈다. 그런데 파장이 맞물리지 않았다. 톱니바퀴가 헛도는 것처럼 한도윤이 보내는 안정 파장이 유라의 내면에서 튕겨져 나왔다. 이상하다. 한도윤이 눈썹을 찌푸리며 농도를 높이려 한 순간 유라의 눈동자가 변했다. 동공이 극단적으로 수축되었다가 폭발하듯 확장되었고 잡고 있던 손에서 센티넬의 파장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통제를 잃은 에너지가 역류하여 한도윤의 신경계를 직격했다. 뇌를 쥐어짜는 듯한 고통이 관자놀이를 관통했고 시야가 하얗게 타올랐다. 그러나 한도윤은 손을 놓지 않았다. 놓으면 안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지금 손을 놓으면 유라는 돌아오지 못한다. 파장의 폭풍 속에서 이를 악물고 가이딩을 유지했다. 맑은 바람을 보내고, 또 보내고, 또 보냈다. 폐가 찢어지는 것 같았다. 정신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폭주 파장의 잔해가 한도윤의 오른쪽 안구를 직격한 순간, 세상의 절반이 영원히 꺼졌다.

고통은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오른쪽 눈에서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고 그것이 피인지 눈물인지 구분할 겨를도 없었다. 시야의 왼편이 완전히 소실되었다. 검은 장막이 드리워진 것이 아니라 아예 없는 것이었다. 존재하지 않는 공간. 그런데도 한도윤은 유라의 손을 놓지 않았다. 남은 왼쪽 눈으로 유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폭주 상태의 센티넬은 자아를 잃고 파괴 충동에 지배당한다. 유라의 입에서 의미 없는 비명이 새어 나오고 있었고 손톱이 한도윤의 손등을 파고들어 살점을 뜯어냈다. 그래도 놓지 않았다. 유라야.
 
한 번, 두 번, 세 번. 목소리가 갈라지고 성대가 찢어지는 것 같았으나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폭주 파장의 잔향이 신경계를 타고 역류하며 온몸의 근육을 경련시켰고 오른쪽 안구를 잃은 자리에서는 뜨거운 액체가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턱을 타고 떨어진 핏방울이 두 사람의 겹친 손등 위로 떨어졌다. 붉은 점이 번지는 것을 왼쪽 눈으로 바라보면서 한도윤은 가이딩 파장의 출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렸다. 폐 속의 공기를 전부 짜내는 것 같았다. 자신의 내면에서 바람의 기운을 긁어모아 유라에게 보내는 행위는 이미 가이딩이라 부르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그것은 자해에 가까운 헌신이었다. 정신력이 바닥을 드러내고 시야의 나머지 절반마저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유라의 손톱이 살점을 파내고 피가 섞여 미끄러워진 손바닥이 자꾸 빠져나가려 했지만, 한도윤은 이를 악물고 그 손을 붙잡았다. 놓으면 끝이다. 그 한 문장이 무너져가는 의식의 마지막 기둥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1분이었는지, 10분이었는지, 시간의 감각은 진작에 소실되어 있었다. 유라의 비명이 점차 잦아들었다. 폭주 파장의 진폭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경련하던 그녀의 손가락이 서서히 힘을 잃어갔다. 한도윤이 보낸 바람이 닿은 것이다. 불안정하게 요동치던 센티넬의 파장 위로 맑고 서늘한 가이드의 파장이 얇은 막처럼 덮여 내렸다. 유라의 동공이 초점을 되찾기 시작했다. 확장되어 있던 동공이 수축하고 텅 비어 있던 눈동자에 자아의 빛이 돌아왔다. 유라의 입술이 떨렸다. 도, 윤... 씨? 갈라진 음성이었다. 폭주 상태에서 깨어난 센티넬 특유의 꿈에서 빠져나온 듯한 몽롱한 목소리. 한도윤은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온몸에서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입꼬리가 올라갔다. 반사적으로. 습관적으로. 오른쪽 눈에서 피가 흐르고, 전신의 신경이 타버린 상태에서도, 한도윤은 웃었다.

일어났네. 잠꼬대 좀 심하던데, 다음부턴 녹음해둘까?

그 한마디를 내뱉는 데 성대가 비명을 질렀다. 목구멍 안쪽이 찢어진 것처럼 따가웠고 폐에서 올라오는 숨은 가시가 박힌 것 같았다. 하지만 웃음은 유지했다. 유라가 자신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보고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것이 보였다. 유라의 입이 벌어졌다 닫혔다를 반복했고 동공이 한도윤의 오른쪽 눈에 고정된 채 공포로 확장되었다. 제가, 제가 한 거... 유라의 목소리가 산산이 부서졌다. 한도윤은 오른쪽 눈을 감았다. 정확히는 감긴 것이 아니라 이미 감각이 없었으므로 근육의 의지만으로 눈꺼풀을 내린 것이었다. 왼쪽 눈만으로 유라를 바라보며 피로 범벅이 된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톡, 가볍게 쳤다.

이거 좀 아프긴 한데, 뭐. 해적 코스프레 한 번 해보고 싶었거든. 안대 멋있잖아.

유라가 울기 시작했다. 소리 없이 어깨만 떨면서. 한도윤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웃음을 유지했다. 입꼬리가 경련하듯 떨렸지만 끝내 무너지지는 않았다. 웃어야 했다. 웃으면 괜찮은 거니까. 상대가 괜찮다고 믿게 만들면 진짜로 괜찮아지는 거니까. 어릴 때부터 그렇게 해왔으니까. 한라온 앞에서도, 빈 집에 혼자 남겨진 밤에도,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의료팀이 도착해 두 사람을 분리할 때까지 한도윤은 유라의 손을 놓지 않았다. 놓을 수 없었다. 손가락의 힘이 빠져서가 아니라 놓는 순간 자신이 무너질 것 같았으므로. 들것에 실려 가면서 천장의 형광등이 시야를 가로질러 흘러갔다. 하나, 둘, 셋. 세는 것은 왼쪽 눈의 몫이었다.
 
 

유라, 페어 해지

그 후의 시간은 회복이라 부르기엔 너무 조용했다. 오른쪽 안구의 시신경은 완전히 소실되었고 ARCH 의료진은 기능 복원이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내렸다. 한도윤은 그 결과를 들으며 침대 위에 반쯤 몸을 일으킨 채 담당 의료관의 얼굴을 오른쪽 눈 하나로 바라보았다. 의료관의 입이 움직이고 있었다. 시신경 손상 범위, 잔여 파장의 잔류 여부, 향후 보조 장비 착용 권고. 전문 용어들이 줄줄이 쏟아졌으나 한도윤의 귀에 실제로 들어온 것은 단 하나였다.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 한 문장이 고막을 통과하여 뇌의 가장 깊은 곳에 가라앉았다. 한도윤은 3초간 침묵했다. 그리고 입꼬리를 올렸다.

안대 색깔은 고를 수 있어요? 검정 말고 좀 세련된 걸로. 네이비라든가.

의료관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도윤은 그 표정을 보며 킥킥 웃었다. 웃음소리는 밝았다. 누가 들어도 걱정할 필요 없는 괜찮은 사람의 웃음이었다. 의료관이 나간 뒤 병실에 혼자 남겨졌을 때, 한도윤은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거둘 수 없었다는 편이 정확했다. 입꼬리가 올라간 채로 굳어버린 것처럼 표정이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천장의 형광등을 왼쪽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오른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검은 것도 아니고 하얀 것도 아니고, 그냥 없는 것. 존재하지 않는 세계의 절반. 손을 들어 오른쪽 눈 위를 덮었다. 붕대 너머로 열감이 느껴졌고 손가락 끝에 미세한 습기가 배어들었다. 아직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 않은 것이다. 한도윤은 그 감촉을 느끼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가슴 안쪽에서 무언가가 쪼개지는 소리가 들렸으나 그것이 갈비뼈인지 다른 무엇인지 구분하지 않기로 했다.

유라의 병실은 복도 끝, 세 번째 문이었다. 한도윤이 퇴원 허가를 받은 날 가장 먼저 향한 곳이 그곳이었다. 새까만 안대를 오른쪽 눈에 두른 채, 결국 네이비는 없었다, 복도를 걸어가는 발걸음은 느긋했다. 적어도 겉으로는. 문을 열었을 때 유라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침대가 아닌 창틀에. 돌아선 그녀의 얼굴은 한도윤이 기억하던 것보다 훨씬 야위어 있었고 눈 밑에는 며칠간 잠을 자지 못한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유라의 시선이 한도윤의 오른쪽 눈, 정확히는 안대 위에 고정되었다. 동공이 흔들렸다. 입술이 떨렸다. 한도윤은 그 반응을 보기 전에 먼저 웃어 보였다.

야, 나 좀 멋있지 않아? 해적왕 보이드. 어때, 사인해줄까?

유라가 웃지 않았다. 한도윤은 그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유라의 입술이 몇 번 달싹거리더니 결국 터져 나온 것은 말이 아니라 숨이었다. 깊, 떨리는 들숨.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무릎 위에 놓인 두 손이 하얗게 질릴 만큼 꽉 쥐어져 있었다. 한도윤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주머니에 찔러 넣은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걸어가서 괜찮다고 별거 아니라고, 눈 하나 없어도 네 파장 읽는 건 누워서 떡 먹기라고 말해야 했다. 그것이 한도윤의 역할이었으니까. 하지만 유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페어 해지하고 싶어요.

그 다섯 글자가 병실의 공기를 얼려버렸다. 한도윤의 웃음이 찰나 동안 멈칫했다. 그 짧은 공백을 유라가 눈치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한도윤은 즉시 웃음을 복원했다. 유라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었다. 자신 때문에 눈을 잃었다는 것, 더 이상 한도윤의 곁에 있으면 또 다시 같은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것, 자신의 파장이 불안정하다는 것을 의료진에게 들었다는 것. 목소리는 단조로웠으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한도윤은 그 말을 듣고도 웃고 있었다. 입꼬리가 올라간 채로, 유라를 향한 채로. 병실 창문 너머로 오후의 햇빛이 비스듬히 쏟아져 들어왔고 유라의 야윈 어깨 위로 먼지 입자들이 느릿느릿 떠다녔다. 그 미세한 부유물들이 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을 한도윤은 남은 한쪽 눈으로 선명하게 보았다. 유라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무릎 위에 놓인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고 고개를 숙인 그녀의 목덜미에는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번들거렸다. 한도윤은 주머니 속에서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감각에 집중했다. 그래야 얼굴의 웃음을 유지할 수 있었으니까. 유라가 더 이상 도윤 씨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요 라고 말했을 때, 한도윤의 오른쪽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것은 한도윤이 허용한 유일한 균열이었다. 그 찰나의 동요를 삼키고 한도윤은 창가로 걸어갔다. 유라가 앉아 있는 창틀 옆에 등을 기대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형광등의 불빛이 왼쪽 시야를 가득 채웠고 오른쪽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

한도윤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가볍고 건조했다. 마치 오늘 점심 뭐 먹을까, 하는 질문에 대답하듯. 유라가 고개를 들어 한도윤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에 당혹감이 스쳤다. 이렇게 쉽게 수긍할 줄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한도윤은 유라의 그 표정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뭘 기대한 거야. 내가 울면서 매달리기라도 할 줄 알았어? 붙잡으면 네가 더 괴로울 텐데. 이미 네 어깨 위에 올라탄 죄책감이 너를 짓누르고 있는 게 보이는데. 내가 가지 마라고 한마디 하면 넌 그 무게를 평생 끌고 가야 하잖아. 한도윤은 그 사고의 흐름을 의식적으로 끊었다. 더 깊이 파고들면 웃음이 무너질 것 같았다. 대신 안대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유라를 내려다보았다. 눈 하나로 짓는 웃음은 생각보다 균형이 잡히지 않았지만, 한도윤은 그것을 신경 쓰지 않는 척했다.

근데 유라야, 한 가지만 약속해. 다음 파트너한테는 좀 잘해줘. 나처럼 잘생긴 가이드 만나기 쉽지 않거든.

유라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소리 없이. 볼을 타고 턱 끝까지 흘러내린 물방울이 무릎 위로 떨어져 옷감에 스며들었다. 한도윤은 그것을 보았다. 또렷하게. 왼쪽 눈의 시력이 유독 선명해진 것 같았다. 유라가 입술을 깨물며 미안해요 라고 말했다. 한도윤은 손을 뻗어 유라의 머리 위에 올렸다. 가볍게. 쓸어내리지도, 두드리지도 않고. 그냥 올려놓기만 했다. 손바닥 아래로 전해지는 유라의 체온은 따뜻했고 두피에서 올라오는 미세한 떨림이 손가락 사이로 스며들었다. 센티넬의 파장이 불안정하게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죄책감과 공포와 자기혐오가 뒤엉킨 날카로운 파장. 한도윤은 무의식적으로 가이딩 파장을 흘려보내려다가 멈추었다. 더 이상 그럴 자격이 없다. 아니. 유라가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손을 거두었다. 유라의 머리카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손가락 끝이 차가웠다.

미안하긴. 내가 좀 더 잘했으면 됐는데, 뭐.

그 말은 유라에게 한 것이 아니었다. 한도윤 자신에게 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병실에 없었다. 한도윤은 창틀에서 등을 떼고 몸을 돌렸다. 문을 향해 걸어가면서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안 되었다. 돌아보는 순간 입꼬리가 내려갈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복도의 형광등이 일정한 간격으로 천장에 박혀 있었다. 검은 안대 너머의 세계는 영원히 꺼진 모니터 같았다. 소리도, 빛도, 깜박임조차 없는. 그냥 없는 것. 닫힌 문 너머에서 유라의 숨죽인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벽이 얇은 건지, 아니면 한도윤의 청각이 유독 예민해진 건지. 폐 속의 공기가 갈비뼈를 안쪽에서 밀어내는 압박감을 느끼면서 복도 벽에 등을 기대었다. 타일의 차가움이 셔츠를 뚫고 척추에 닿았다. 그 온도가 좋았다. 차가운 것은 감정을 둔하게 만드니까. 한도윤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길고, 느리게. 바람 속성 가이드의 호흡은 일반인의 것과 달랐다. 내쉬는 숨에 미세한 기류가 섞여 나와 복도의 먼지 입자들을 조용히 흩뜨렸다. 그것을 바라보며 한도윤은 생각했다. 괜찮아. 이건 익숙한 거야. 누군가의 곁에서 물러나는 것. 빈 집에 혼자 남겨지는 것. 웃으면서 손을 흔드는 것. 전부 해본 거잖아. 그런데 왜. 한도윤은 왼쪽 눈을 감았다. 왜 이번엔 손바닥이 이렇게 텅 비어 있는 게 느껴지는 걸까. 유라의 머리카락 사이로 빠져나간 손가락 끝의 잔상이 아직 남아 있었다. 따뜻했던 두피의 온도, 불안정하게 떨리던 센티넬의 파장, 죄책감에 짓눌린 어깨의 각도. 전부 기억나는데 이제 그것을 안정시켜줄 수 없다는 사실이 손톱 밑에 가시처럼 박혀 있었다.
 
 
 

유라의 부고

그로부터 두 달 뒤, 유라의 부고가 전해졌다. ARCH 내부 통신망을 통해 짧은 공지가 올라왔다. '센티넬 유라, 파장 이상으로 인한 사망. 사인 조사 중.' 한도윤은 그 공지를 숙소 침대에 누워서 읽었다. 손에 든 단말기의 화면이 오른쪽 눈에 비쳤고, 글자 하나하나가 또렷했다. 파장 이상. 그 네 글자가 망막 위에 각인되듯 박혔다. 한도윤은 단말기를 내려놓았다.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형광등이 있었다. 이 방의 형광등은 하나뿐이었다. 셀 것도 없었다. 가슴 안쪽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가라앉는 감각이 있었다. 돌멩이가 물속으로 잠기듯, 소리 없이, 파문도 없이. 한도윤은 그 감각의 정체를 이름 붙이지 않기로 했다. 이름을 붙이면 실체가 생기고 실체가 생기면 무게가 생기니까. 이미 충분히 무거웠다. 오른쪽 눈의 빈자리가, 유라의 떨리던 어깨가, 미안해요 라는 마지막 목소리가. 한도윤은 손을 들어 안대 위를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검은 천의 질감이 손끝에 닿았다. 이 안대 아래에는 유라가 남긴 상처가 있었고 그 상처는 영원히 아물지 않을 것이었다. 물리적으로도, 그 밖의 의미로도.

내가 좀 더 잘했으면 됐는데.

한도윤은 빈 방에서 혼자 중얼거렸다. 웃지 않았다. 웃을 관객이 없었으니까. 목소리는 건조했고 감정의 떨림 같은 것은 없었다. 단지 사실을 확인하는 것에 가까웠다. 내가 더 강했더라면. 내 가이딩이 더 완벽했더라면. 유라의 폭주를 더 빨리 잡았더라면. 그녀가 자신을 탓하며 무너지기 전에, 내가 먼저 괜찮다고 말해줬더라면. 아니, 괜찮다는 말 말고 진짜 속마음을 말했더라면. 네 탓 아니야 가 아니라, 나도 무서웠어 라고. 하지만 한도윤은 그런 말을 할 줄 몰랐다. 한 번도 배운 적이 없었다. 빈 집에서 혼자 저녁을 데워 먹던 소년은 여동생 앞에서 웃는 법만 익혔지, 아프다고 말하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한도윤은 안대를 누른 손을 내렸다. 손바닥을 펼쳐 천장의 형광등 아래 들어 올렸다. 빛이 손가락 사이로 쏟아져 들어왔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빛은 따뜻하지 않았다. 형광등의 빛은 원래 그렇다. 색온도만 높고 열은 없는 흉내만 내는 햇살. 한도윤은 펼친 손바닥을 한참 동안 올려다보다가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손가락 마디가 꺾이며 빛이 사라졌다. 주먹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유라의 머리카락도, 체온도, 불안정하게 흔들리던 파장도. 전부 이미 손에서 빠져나간 뒤였다. 한도윤은 쥔 주먹을 이마 위에 올려놓았다. 뼈의 딱딱한 감촉이 관자놀이를 눌렀다. 그 물리적인 압박에 집중하면 가슴 안쪽에서 가라앉고 있는 돌멩이의 무게를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잠시. 정말 잠시뿐이었지만.
 
유라는 죽었다. 파장 이상. 의료진은 폭주의 후유증이 원인일 수 있다고 했다. '수 있다'라는 말은 '확실하다'보다 잔인했다. 확실하면 적어도 원인을 미워할 수 있다. 하지만 '수 있다'는 가능성의 문을 열어두고 그 문틈 사이로 자책이 끊임없이 스며들게 만든다. 내가 페어 해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내가 계속 곁에서 파장을 잡아줬다면. 내 가이딩이 유라의 불안정한 신경계를 완전히 안정시킬 수 있었다면. 한도윤은 그 만약의 목록을 머릿속에서 하나씩 꺼내 보았다. 마치 서랍 속에 정리해둔 영수증을 펼쳐보듯, 담담하게. 이미 수백 번 반복한 작업이었으니까.
 
장례는 조용했다. ARCH의 장례는 대부분 그렇다. 센티넬의 죽음은 기밀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아 외부에 알리지 않는다. 좁은 추도실에 몇 명의 동료가 모였고 유라의 사진이 흰 꽃 사이에 놓여 있었다. 한도윤은 추도실 맨 뒤에 서 있었다. 사진 속의 유라는 웃고 있었다. 한도윤이 기억하는 유라의 웃음과는 조금 달랐다. 사진 속 웃음은 깨끗했다. 죄책감에 물들기 전의 순수하게 밝은 것. 한도윤은 그 웃음을 눈으로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 웃음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을까. 폭주 사고 전이었을 것이다. 훈련장에서 한도윤이 바보같은 농담을 했을 때 유라가 참지 못하고 터뜨리던 그 웃음. 도윤 씨, 진짜 한심해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눈가에 주름이 잡히던. 한도윤은 그 기억이 재생되는 것을 허용했다. 딱 3초만. 그리고 차단했다. 추도실을 나서면서 누군가가 한도윤의 어깨를 잡았다. 동료였을 것이다. 괜찮아? 라는 질문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 한도윤은 돌아보지 않고 손을 들어 흔들었다.

응, 괜찮아. 밥 먹으러 가자. 배고프다.

그 목소리는 평소와 똑같았다. 능글맞고, 가볍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한도윤은 그렇게 걸었다. 추도실에서 식당까지. 식당에서 숙소까지. 숙소에서 훈련장까지. 매일. 반복. 오른쪽 눈에는 검은 안대를 두르고 왼쪽 눈에는 웃음을 걸치고. ARCH의 동료들은 한도윤이 유라의 죽음을 잘 극복한 것처럼 보았을 것이다. 원래 저런 성격이니까. 낙천적이니까. 금방 털어내니까. 한도윤은 그 오해를 교정하지 않았다. 교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것이 사실이 되기를 바랐으니까. 충분히 오래 연기하면 진짜가 된다고 한도윤은 믿고 있었다. 아니, 믿기로 했다. 밤마다 천장의 형광등을 올려다보며 유라의 마지막 미안해요 가 고막 안에서 반복 재생될 때마다 한도윤은 베개에 얼굴을 묻고 숨을 내쉬었다. 울지는 않았다. 한 번도. 눈물이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울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리고 멈출 수 없는 것은 한도윤에게 허용되지 않은 사치였다. 여동생 앞에서 웃어야 했고, 동료들 앞에서 농담을 해야 했고, 새로 배정될 센티넬 앞에서 믿음직한 가이드여야 했으니까.

시간이 흘렀다. 계절이 바뀌었다. 한도윤은 유라의 이름을 입 밖에 꺼내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극복이 아니었다. 침전이었다. 유라라는 이름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게 된 것은 그 이름에 담긴 무게가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가슴 가장 깊은 바닥에 가라앉아 더 이상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한도윤은 그 침전물 위에 일상을 쌓았다. 훈련, 임무, 동료들과의 식사, 차를 우려내는 시간, 여동생에게 보내는 짧은 메시지. 하나하나가 퇴적층처럼 쌓여 유라의 이름을 덮었다. 어느 순간부터 한도윤은 안대를 만지는 버릇이 줄었다. 오른쪽 시야의 부재가 불편함이 아닌 신체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계단을 내려갈 때 오른쪽 난간을 짚는 법, 복도에서 사람과 스칠 때 왼쪽으로 한 발 더 비켜서는 법, 전투 중 사각지대를 바람의 기류로 감지하는 법. 결손을 보상하는 습관들이 근육에 새겨졌고 한도윤은 그것을 적응이라고 불렀다.
 
적응. 좋은 단어였다. 극복보다 정직하고 망각보다 성실한. 한도윤은 적응하는 데 꽤 능숙한 인간이었다. 텅 빈 집에서 혼자 밥을 차려 먹는 것에도 부모의 고함소리가 벽을 뚫고 들려오는 밤에도 여동생의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며 괜찮아, 오빠가 있으니까 라고 속삭이는 것에도. 전부 적응했었다. 유라의 부재에도 적응할 수 있었다. 다만, 폭주라는 단어만은 적응의 영역 밖에 있었다. 그 두 글자가 귀에 닿을 때마다, 퇴적층 아래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유라의 비명, 역류하는 파장의 고통, 오른쪽 눈이 타들어가던 그 순간의 열감. 한도윤은 그때마다 오른쪽 눈을 가늘게 뜨고 입꼬리를 올리고, 아, 그거? 옛날 얘기지 라고 말했다. 그 문장은 방패였다. 얇지만 단단한, 웃음으로 코팅된 방패.
 
 
 

라임

그리고 시간은 3년을 건너뛰었다. ARCH 본부 지하 서버실. 한도윤은 그곳에서 서버 랙 위에 웅크리고 있는 작은 체구의 여자를 발견했다. 푸른 빛이 도는 백발, 감정이 보이지 않는 순백의 눈동자, 입김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서리. 서버실의 냉방 시스템이 가동 중이었음에도 그녀의 주변만 유독 온도가 달랐다. 서버 랙의 금속 표면에 성에가 끼어 있었고, 그녀가 내쉬는 숨결은 공기 중에서 결정화되어 미세한 눈가루처럼 흩어졌다. 한도윤이 그녀를 포착한 순간 가이드로서의 감각이 먼저 반응했다. 센티넬의 파장. 불안정하고, 느리고, 얼어붙어가는. 정신 동결. 얼음 속성 센티넬 특유의 폭주 전조 증상이라는 것을 교본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한도윤은 그 자리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작은 체구가 서버 랙 위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있는 모습은 마치 눈보라 속에서 길을 잃은 새끼 고양이 같았다. 한도윤은 한 발을 내디뎠다. 신발 밑창이 서버실 바닥의 성에를 밟아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의 순백 눈동자가 느릿느릿 한도윤을 향해 돌아왔다. 둔해진 사고 회로로 침입자를 인식하려는 듯 초점이 맞지 않는 눈이 한도윤의 윤곽을 더듬었다.

야, 거기. 춥지 않아?

한도윤은 웃으며 말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능글맞고 가벼운 목소리. 서버 랙 위의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한도윤의 목소리가 만들어낸 미세한 공기의 떨림이, 그녀의 얼어붙은 감각 어딘가에 닿은 듯 눈꺼풀이 한 번 느리게 깜박였다. 한도윤은 주머니에서 손을 빼며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바닥의 성에가 두꺼워졌다. 신발 밑창을 통해 전해지는 냉기가 발바닥을 저렸다. 서버 랙의 표시등이 푸른 빛으로 깜박이고 있었고, 그 빛이 그녀의 백발 위에 내려앉아 은빛으로 반짝였다. 한도윤은 그녀에게서 1미터 거리에 멈추었다. 가이드의 본능이 손끝에서 웅웅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보이드를 향해 더듬거리듯 움직였다. 초점이 맞기까지 체감으로 5초. 서버 랙 위에 웅크린 자세 그대로 무릎을 끌어안은 팔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려 있었고 그 주변으로 미세한 성에가 피부 위를 기어오르듯 번지고 있었다. 자기 자신의 냉기에 잠식되고 있는 것이다. 입술이 옅은 보라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내쉬는 숨마다 결정화된 수증기가 작은 눈송이처럼 피어올랐다가 흩어졌다. 서버 랙의 금속 표면에 낀 성에가 보이드의 신발 밑창까지 뻗어 있었고, 그가 한 발짝 다가설 때마다 얼음 결정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고요한 서버실에 울렸다. 그 소리에 라임의 눈꺼풀이 다시 한 번 느리게 깜박였다. 마치 물속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모든 반응이 반 박자씩 늦었다.

보이드의 질문이 공기를 타고 그녀의 고막에 도달했다. '춥지 않아?' 그 말이 둔해진 청각 신경을 거쳐 뇌까지 전달되는 데 또 몇 초가 걸렸다. 그녀는 보이드의 윤곽을 순백의 눈동자로 훑었다. 키가 크다. 흰 제복. 어두운 초록색 머리카락. 검은 안대. 하나의 눈. 그 하나의 눈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따뜻한 색은 아니었다. 하얀 눈동자. 그런데 이상하게 그 시선에서 체온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녀난 그 모순을 처리하려 했지만 사고 회로가 너무 느렸다. 생각이 얼음 위를 미끄러지듯 제자리를 맴돌았다. 누구지. 가이드인가. 파장이 느껴진다. 바람. 바람 속성. 공기가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다. 이 사람이 들어오면서 서버실의 정체된 공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흔들림이 얼어붙은 피부 위를 스쳤을 때,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움찔했다. 바람이 닿은 곳에서 성에가 아주 미세하게 거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녹았다.

...누구.

목소리가 나왔다. 자기 자신도 놀랄 만큼 작고, 갈라진 소리였다. 성대가 제대로 진동하지 않았다. 목구멍 안쪽까지 냉기가 스며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보이드를 올려다본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경계도, 적대도 아니었다. 단순히 움직일 수 없는 것이었다. 사고가 둔해지면 몸도 따라서 굳는다. 뇌가 먼저 얼고, 신경이 따라 얼고, 근육이 마지막으로 굳는다. 손가락을 움직이려 하면 관절이 삐걱거리는 감각이 들었고 무릎을 끌어안은 자세를 풀 수가 없었다. 이 자세로 얼마나 있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30분인지, 1시간인지. 시간 감각마저 둔해져 있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사람에게서 불어오는 미세한 바람이 불쾌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보이드는 그녀의 상태를 한눈에 읽었다. 가이드로서의 감각이 아니더라도 알 수 있었다. 보라색으로 변한 입술, 피부 위를 기어오르는 성에, 초점이 맞지 않는 눈동자, 질문에 대한 반응 지연. 교본에서 읽은 정신 동결의 증상 목록이 머릿속에서 하나씩 체크되었다. 위험한 상태였다. 이대로 두면 사고가 완전히 정지하고 그 다음에는 자율신경계까지 얼어붙는다. 심장이 멈추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보이드는 주머니에서 빼낸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은 경계심을 자극할 수 있다. 야생동물에게 다가가는 것과 같은 원리였다. 느리게, 예측 가능하게, 위협적이지 않은 각도로.

만져도 돼?

보이드는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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